사도세자(1735-1762)는 조선 21대 왕 영조와 영빈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2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부왕과의 갈등 끝에 27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가계 구조와 후손
사도세자는 정실 혜경궁 홍씨를 비롯해 4명의 부인에게서 5남 3녀를 두었습니다.
- 정실 : 혜경궁 홍씨(소생: 정조, 은언군, 은신군)
- 첩실 : 숙빈 임씨(소생: 은언군, 은신군), 경빈 박씨(소생: 은전군, 청근옹주)
- 기타 : 수칙 이씨, 여승 가선(자녀 없음)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후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사도세자의 딸 청선공주(1756-1802)는 흥은위 정재화와 혼인했으나 부부 불화로 고통받다 46세에 사망했으며, 그 유물 1,014점이 현대에 전해집니다.

'사도(思悼)' 시호의 함의
1762년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숨진 뒤, 1899년 고종이 장헌세자로 추존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부여했습니다. 이 시호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됩니다:
- 사(思) : 그를 기억하려는 왕실의 복권 의지
- 도(悼) : 비극적 죽음에 대한 애도
당시 『현고기』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아들의 반역 혐의를 믿고 자결을 명했으나, 실제로는 정치적 갈등과 세자의 정신질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조 최대의 부자 갈등 사례로, 2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왕권과 가족 관계의 딜레마를 상징합니다.

역사적 교훈
이 비극은 과도한 기대가 자식에게 미치는 압박, 왕권 수호 명분이 초래한 비인간적 결정 등을 보여줍니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전력했지만,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걸친 트라우마는 조선 후기 정치구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